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 세 장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영화 내내 마리옹 꼬띠아르는 단 세 번 웃는다. 앞뒤로 배치된 우울하고 지겨운 삶의 레퍼토리를 순식간에 아름다운 역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 어떤 평론가가 이야기했듯, 가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감독들이 있다. 결코 도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살인의 장면을 쾌감으로 바꾸어 놓는 감독들 말이다. 예를 들어 <킬빌> 시리즈의 쿠엔틴 타란티노가 나에게는 그런 감흥을 가장 강렬하게 안겨준 감독이었다. (고등학생 때, 다른 표를 끊고 몰래 상영관에 잠입한 영화 중 하나다.


마찬가지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데다가 심각한 우울증이 일상을 재배하고 있는 그녀에게 돈과 자신의 복직을 놓고 팀원들에게 투표를 강요하는 사장의 생존 놀음은 절대 '아름다운 역경'일 수 없다. 영화 속 '해고'라는 요소는 성취감과 해소욕을 선사하기 위한 일반적인 드라마의 갈등 장치보다 훨씬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리웃 영화처럼 해고에 앙금을 품고 복수를 계획해 실행에 옮기는 등의 스펙터클함은 (당연히) 어디에도 없다. 해고를 통보한 사장 또한 폭력을 휘두르거나, 재투표 기회마저 말살해 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기회를 준다'는 식의 명분적 정의 정도는 추구하는 편이다. 보통 한국의 드라마나 헐리웃 영화 곳곳에서 복수의 기제가 가해자의 악행인데, 적어도 외면상 그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헐리웃이었다면 화려한 액션이 흐리기 십상인 '해고'의 본질이 다르덴의 필름에 남았다. 음악도, 작위적 연출도 없이 따라간 다르덴 형제의 시선은 전작들처럼 영화가 끝난 뒤 관객으로 하여금 절레절레 고개를 젓게 만든다. '행복해'라며 웃는 찰나의 순간을 위해 이 많은 역경이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만 있어도 다 한 것 아닌가. 그들이 묻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굳이 이 마지막 장면을 포스터에 넣은 것도, 결국은 '계속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혹은 '지지 마'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현실적인 해고 여성, 엄마의 지위까지 떠안고 있는 우울증 걸린 여성의 히스테릭한 표정과 말투, 미세한 인상까지 완벽하게 연기한 꼬띠아르가 관객에게 떠안긴 것은 질척한 현실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경을 극복했을 때 오는 일말의 쾌감이 삶에 의미를 선사한다는 이야기. 슬프고도 빛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라는 이야기가 질척하고 짜증스럽고 냄새나는 현실을 넘어선다. 









1천 유로의 보너스 vs 동료의 복직이라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선택지는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을 담은 영화는 더욱 슬플 따름이고, 꼬띠아르의 연기는 현실이 아니라면 재연처럼 다가온다. 실화를 재해석해 생산해 낸 작품보다도 훨씬 더 현실과 가까운 탓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연기자의 롤-플레잉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해고가 불러온 자기 비하가 어떻게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는지, 그리고 구석으로 몰아넣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나를 그렇게 몰아넣는 것은 해고라는 사고(라고 표현하겠다) 그 자체가 아니라 해고의 원리가 내포하는 '필요없음'에 대한 절망이다. 그녀가 한결같이 고수하는 말투는 '나에게 투표해줘'가 아니라 '투표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다. "안 되면 매달리기라도 하던가" "하나도 안 궁해보여" 따위의 말로 자존감을 꺾는 일이 비일비재한 한국 사회에 그녀의 모습은 낯설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사람이 꽤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정'이란 개념을 '능력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란 정의로 치부하는 이가 많은 한국 사회에서  '부탁'이란 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자기 파괴적 요소가 담겨야만 한다. 그래야 들어주는 이가 우월함을 느끼며 수락할테니. 


다르덴 형제는 말한다. 한 사회에,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더라도 무언가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끊임없이 치워가며 살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남는 것은 '나'이고 '나의 행복'이다. 그녀의 방문으로 인해 돈과 복직을 놓고 가족과 다투던 동료들도 결국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찾아간다. 현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영화의 끝이 행복한 동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 따로 할 계획이다. 심각한 강박과 우울에 시달리는 연인을 두고 있었을 때, 2년 간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라 영화를 보는 내내 턱턱 숨이 막혔다. 그것이 그녀의 탓이 아님에도,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녀보다 그녀의 남편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다. 파브리지오 롱지온의 연기도 마리옹 꼬띠아르 못잖게 완벽했다. 



 



 


  













되감기가 어려운 영화들


 

며칠 전에 <파수꾼>을 다시 보았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DVD를 돌리기 어려운 영화들이 몇 편 있다. <파수꾼>은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여기 들어와 있는 영화들 중에는 워쇼스키 남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있다. 많은 이들이 썩 좋지 않은 평을 내놨음에도 나에게는 아주 훌륭한 영화였는데, 이 영화의 경우 단순히 길어서 재생하기 어려운 경우다. 마찬가지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도 우선 러닝타임이 길다. 심지어 번뜩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자극을 받기 전까지 지켜봐야 하는 지지부진한 삶의 과정이 꽤 고통스럽다. 이외에도 <색, 계>, 그리고 <해피투게더>를 필두로 한 왕가위 감독의 90년대 역작들이 있다. 물론 <식스센스>처럼 어린시절의 나를 식탁 밑을 못 보는 아이로 만든 영화도 있고 말이다. 눈치채셨다시피,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은 이 분류가 무색하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파수꾼>이 다시 보기 어려운 영화인 까닭은 누구라도 아는 이야기라서다. 상처 많은 10대 시절을 상기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그 찬란한 시기를 단숨에 지질하고 질척한 슬픔 속으로 이양한다. 사실 내가 겪어본 시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보다 훨씬 지지부진했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는 내가 왕따 당할까봐 다른 친구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렇게 진짜 악질이었던 내 10대의 어느 순간들. 나중에 울며불며 사과했지만 그 싸늘한 눈초리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치 기태를 바라보던 희준의 것처럼. 그리고 진짜 인과응보였는지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던, 끔찍한 기억의 모퉁이가 살아난다. <파수꾼>은 그런 영화다.




가장 대칭적인 세대, 10대의 이야기



인간 관계의 본질을 경제학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좀 우스울 수는 있지만, 이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정보의 비대칭성. 흔히 중고차 시장, 레몬 마켓의 사례로 일컬어지는 이 용어를 사용하면 대체로 모든 '인간적인' 관계를 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아는 게 없으니, 눈치로라도 조금 더 아는 사람이 약아빠진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으니. 사실 10대는 그나마 덜 비대칭적인 세대다. (대체로) 가장 순수하게 진심을 나누는 시기이므로 가장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은 세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내가 네가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니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빈 공간. 그곳은 어떤 날엔 황량하고 또 어떤 날에는 늪지같다. 서로 '몰랐어' '그랬어?' '오해야' '미안해' 등의 언어가 오가기 전까지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고, 늪에서 발을 뺄 수조차 없다. 숨막히게 초조한 밤이 이어진다. 10대의 밤은 그중에서도 차갑고 또 차갑다. 당장 내일부터 그 친구가 옆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오싹한 외로움이 밀려온다. 우스운 것은 대단히 친화력이 좋거나 옆에 둔 친구가 많은 녀석일수록 이러한 불안의 정도를 강하게 느낀다는 점이다.


기태가 죽었다. 세 사람 중 기태가 죽은 것은 외로움을 극도의 고통스러운 장치로 묘사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희준에게는 여자 문제가 자격지심을 부르고 분노를 일으키는 기제다. 동윤에게는 여자 문제와 우정이 변주된 폭력이 그렇다. 하지만 기태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떠안은 두려움이 있다. 가족의 부재와 그로 인한 애정결핍, 외로움이 불러온 결과다.두 사람이 느낀 것보다 훨씬 내밀하고 본연의 고통인 셈이다.


누구는 10대가 '몰라서 저지르기 때문에 더 무섭다'고 하지만,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20대가 되어도, 불혹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나이가 먹을수록 우리는 상대의 감정에 무뎌진다. 도리어 10대가 훨씬 예민하다. 기태는 희준을 때리면서도 안다. 때리면, 내 친구는 힘들고 상처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희준이 좋아하는 소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했을 때 시쳇말로 '철벽'을 치던 기태의 모습은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오버스럽다. 필사적으로 친구의 기분을 헤아리려 매달린다. 사과하는 모습은 처절할 정도지만, 희준은 여자 관계로 커져버린 자격지심 때문에 그 처절함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쪽을 택한다. 기태 때문에 전학을 간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실상 자신의 자격지심으로부터의 도피다. 기태의 죽음을 알게 된 희준의 얼굴에는 묘한 기쁨이 서려있다. 동윤을 찾아다니는 것도 결국은 기태에게 자신이 이겼기 때문에 베풀 수 있는 승자의 선의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태-동윤, 기태-희준, 희준-동윤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의 겉모습과 그보다 복잡한 감정의 굴레를 보여준다.   


동윤은 기태에게 말한다. "네가 역겨우니까 주변 친구들이 다 떠나는 거야. 옆에 있으면 토할 것 같거든." 20대만 되어도 이런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의뭉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직접적인 표현의 방식은 오로지 10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사실 이렇다. "어떻게 하면 더 상처를 내고, 더 고통스럽게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본래 후회와 가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벌어진 현실보다 늦게 존재하게 마련이다. '조금만 나이를 더 먹었더라면 우리는 그때 그렇게 상처주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이러한 후회는 의미없는 '만약'에의 가정일 뿐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소위 '경험치'가 상승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륜의 미'라는 말 따위가 존재할리 없다. 따라서 이 과정을 겪어보지도 않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작 신체적 퇴화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일 뿐이다. 10대를 반추하는 것이 내가 자라온 과정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가치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창피하고 고통스러운 일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부족했던 자신을 돌이켜보는 일은 정말 부끄럽다.

 

결국 <파수꾼>은 우리의 10대와 너무 밀접하게 가까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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